도시별 주요현황 Main Characteristics of 7 Cities
주 |
|
||||||||||||||
---|---|---|---|---|---|---|---|---|---|---|---|---|---|---|---|
자료 |
|
서울 Seoul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이다. 서울의 면적은 605㎢로서 도쿄의 23개 특별구와 비슷하며, 싱가포르와 뉴욕시보다 다소 작은 크기이다. 서울은 외사산과 내사산에 둘러싸인 분지의 지형이다. 그리고 수계로서 청계천, 중랑천, 홍제천, 안양천, 탄천 등의 지천이 한강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렇게 서울은 동서 간 37㎞, 남북 간 30㎞로, 산악지형의 분지에 입지하고 있고 주변이 1971년부터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이를 제외한 시가화면적은 도쿄나 뉴욕에 비해 상당히 작다. 그러나 인구는 1990년에 1,061만 명을 넘어 1992년 1,097만 명으로 피크를 보이다가 2010년에 979만 명으로 완만한 감소 추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급격한 인구 증가를 보이고 있는 베이징보다 적으나, 도쿄 23개 구부나 뉴 욕, 런던보다는 많은 편이다.
서울시는 대도시권의 중심도시로서 인구밀도가 16,181명/㎢ 이며 21,289명/㎢인 파리를 제외하고는 도쿄 등 타 도시보다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서울대도시권은 서울시를 포함하여 인천광역시와 경기도를 포함하는 지역(수도권)을 의미하며, 도심으로부터 반경 70㎞에 이르는 11,819㎢의 면적 에 약 2,384만 명(2010년)이 살고 있다.
서울의 도시 역사는 백제의 수도로서 위례성이 서울 동남부의 한강변에 위치하였던 약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후 오늘의 도시발전은 서울이 1394년 조선왕조 (1392~1910년)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도시지역 이었던 사대문의 성곽 안과 성곽 밖 교외지역으로 이루어진 서울은 조선시대에 큰 변화 없이 약 20~30만 명 내외의 규모를 유지하였다.
서울은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전기, 철도, 전차, 공원, 상수 도,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을 도입하면서 근대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일제강점기(1910~1945년)로 이어졌고, 점차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불량 정착촌 이 도시 곳곳에 형성되었고, 외곽지역이 급속히 편입되어 새로운 주거지로 변모해 나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시로 부르다가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으며, 한국전쟁(1950~1953년)으로 폐허가 되었다.
서울의 인구는 1942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고 성곽 을 허물고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가 확장되어 나갔다. 해 방 후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인구는 1968 년 4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후 서울시는 국가의 경제성장과 함께 간선도로의 확장 및 연장, 청계고가도로 및 여의도 건 설, 각종 도시 재개발, 무허가 정착지에 시민아파트 건설 등 도시개발을 추진하였다.
1968년 전차를 걷어내고, 1974년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남북한 간의 긴장고조에 따라 서울의 도시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 서울의 경계부에 환상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서울 강북지역의 도시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강남개발이 결정되었으며,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어 신 시가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인구유입이 지속됨 에 따라 1963년 서울의 행정구역도 605㎢로 확장되었다.
1980년대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적극적인 도시개선과 미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잠실지역에 대규모 경기장들과 올림픽공원 및 선수촌 등 올 림픽 관련 시설의 대대적 건설, 한강의 종합개발계획과 한 강변에 강변북로 및 올림픽대로의 건설, 강남지역의 개발에 따른 한강 교량의 지속적 건설, 지하철 2, 3, 4호선의 연이은 개통, 도심부의 재개발 및 주택 재개발이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또한, 을지로와 테헤란로 도시설계에 의한 시가지의 정비 및 계획, 중산층의 폭발적인 주택수요에 대응한 강남, 목동, 고덕, 개포, 상계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도 서 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와 함께, 1988년에는 인구가 천 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선 서울은 지하 철 5~8호선을 추가로 건설하였고, 고층건물들은 서울의 도심과 강남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았다. 그 이후 서울은 교외화와 광역화를 경험하면서 시가지가 경기도로 확산되었으며,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의 5개 신도시와 함께 교외지역이 끊임없이 개발되었다.
100년 전 성곽도시였던 서울은 엄청난 거대도시로 성장하였고, 청계천이 복원되고 서울광장 및 광화문광장 등이 건 설되었으며, 한양도성과 고궁들을 아우르는 역사도심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용산과 삼성동, 잠실, 상암 등에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축물의 건축이 논의 되고, 지하철 9호선과 신분당선의 광역급행노선이 건설되었으며, 중앙버스차로제가 도입되는 등 대중교통 체계가 개편 되었다. 또한,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서울 도심과 부도심, 수도권 도시를 직접 연결하기 위한 광역급행노선이 검토되는 등 편리하고 신속한 대중교통체계를 공급하려고 하고 있다.
서울은 20세기 중반 들어 오늘날의 발전을 시작하였지만, 서구의 런던과 뉴욕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수백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고, 이웃한 도쿄도 이미 100만을 훨씬 넘긴 대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은 20세기 후반 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이들 도시보다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서울은 대중교통, 도로,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도 상당한 수준에 와 있으며, 최근에는 세계의 각종 도시경쟁력 평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예로서, 서울은 일본 모리사가 발표하는 글로벌 파워도시 지수에서 세계 6위의 도시로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반면, 최근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여 저출산, 고령화와 1·2 인 가구의 증가와 높은 주택 가격 때문에 인구의 경기도 이 주, 행정중심복합도시로의 행정기능과 공공기관의 이전 문제 등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도시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따라, 2030 서울플랜에서는 시민참여를 통해 ‘소통과 배려가 있는 행복한 시민도시’란 비전으로 5개의 이슈와 17개의 목표, 58개의 전략으로 통합하고, 공간구조 계획과 생활권계획으로 구체화하여 이를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이렇게 서울은 동서 간 37㎞, 남북 간 30㎞로, 산악지형의 분지에 입지하고 있고 주변이 1971년부터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되어 이를 제외한 시가화면적은 도쿄나 뉴욕에 비해 상당히 작다. 그러나 인구는 1990년에 1,061만 명을 넘어 1992년 1,097만 명으로 피크를 보이다가 2010년에 979만 명으로 완만한 감소 추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급격한 인구 증가를 보이고 있는 베이징보다 적으나, 도쿄 23개 구부나 뉴 욕, 런던보다는 많은 편이다.
서울시는 대도시권의 중심도시로서 인구밀도가 16,181명/㎢ 이며 21,289명/㎢인 파리를 제외하고는 도쿄 등 타 도시보다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서울대도시권은 서울시를 포함하여 인천광역시와 경기도를 포함하는 지역(수도권)을 의미하며, 도심으로부터 반경 70㎞에 이르는 11,819㎢의 면적 에 약 2,384만 명(2010년)이 살고 있다.
서울의 도시 역사는 백제의 수도로서 위례성이 서울 동남부의 한강변에 위치하였던 약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 후 오늘의 도시발전은 서울이 1394년 조선왕조 (1392~1910년)의 수도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도시지역 이었던 사대문의 성곽 안과 성곽 밖 교외지역으로 이루어진 서울은 조선시대에 큰 변화 없이 약 20~30만 명 내외의 규모를 유지하였다.
서울은 19세기 말 개항과 함께 전기, 철도, 전차, 공원, 상수 도, 학교와 병원 등의 시설을 도입하면서 근대 도시로서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곧 일제강점기(1910~1945년)로 이어졌고, 점차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불량 정착촌 이 도시 곳곳에 형성되었고, 외곽지역이 급속히 편입되어 새로운 주거지로 변모해 나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서울시로 부르다가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로 개칭되었으며, 한국전쟁(1950~1953년)으로 폐허가 되었다.
서울의 인구는 1942년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고 성곽 을 허물고 간선도로를 따라 시가지가 확장되어 나갔다. 해 방 후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거치면서 서울의 인구는 1968 년 4백만 명에 이르렀다. 이후 서울시는 국가의 경제성장과 함께 간선도로의 확장 및 연장, 청계고가도로 및 여의도 건 설, 각종 도시 재개발, 무허가 정착지에 시민아파트 건설 등 도시개발을 추진하였다.
1968년 전차를 걷어내고, 1974년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남북한 간의 긴장고조에 따라 서울의 도시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이 서울의 경계부에 환상으로 설정되었다. 그리고 서울 강북지역의 도시기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 강남개발이 결정되었으며, 대대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어 신 시가지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인구유입이 지속됨 에 따라 1963년 서울의 행정구역도 605㎢로 확장되었다.
1980년대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적극적인 도시개선과 미화정책이 시행되었다. 잠실지역에 대규모 경기장들과 올림픽공원 및 선수촌 등 올 림픽 관련 시설의 대대적 건설, 한강의 종합개발계획과 한 강변에 강변북로 및 올림픽대로의 건설, 강남지역의 개발에 따른 한강 교량의 지속적 건설, 지하철 2, 3, 4호선의 연이은 개통, 도심부의 재개발 및 주택 재개발이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또한, 을지로와 테헤란로 도시설계에 의한 시가지의 정비 및 계획, 중산층의 폭발적인 주택수요에 대응한 강남, 목동, 고덕, 개포, 상계지역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도 서 울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이와 함께, 1988년에는 인구가 천 만 명을 넘어서기에 이르렀다. 1990년대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선 서울은 지하 철 5~8호선을 추가로 건설하였고, 고층건물들은 서울의 도심과 강남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았다. 그 이후 서울은 교외화와 광역화를 경험하면서 시가지가 경기도로 확산되었으며,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의 5개 신도시와 함께 교외지역이 끊임없이 개발되었다.
100년 전 성곽도시였던 서울은 엄청난 거대도시로 성장하였고, 청계천이 복원되고 서울광장 및 광화문광장 등이 건 설되었으며, 한양도성과 고궁들을 아우르는 역사도심을 유네스코에 등재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용산과 삼성동, 잠실, 상암 등에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축물의 건축이 논의 되고, 지하철 9호선과 신분당선의 광역급행노선이 건설되었으며, 중앙버스차로제가 도입되는 등 대중교통 체계가 개편 되었다. 또한, 남북통일에 대비하고 서울 도심과 부도심, 수도권 도시를 직접 연결하기 위한 광역급행노선이 검토되는 등 편리하고 신속한 대중교통체계를 공급하려고 하고 있다.
서울은 20세기 중반 들어 오늘날의 발전을 시작하였지만, 서구의 런던과 뉴욕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수백만의 인구를 가진 대도시였고, 이웃한 도쿄도 이미 100만을 훨씬 넘긴 대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은 20세기 후반 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이들 도시보다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현재 서울은 대중교통, 도로, 상하수도 등 도시기반시설도 상당한 수준에 와 있으며, 최근에는 세계의 각종 도시경쟁력 평가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예로서, 서울은 일본 모리사가 발표하는 글로벌 파워도시 지수에서 세계 6위의 도시로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반면, 최근 저성장 시대를 맞이하여 저출산, 고령화와 1·2 인 가구의 증가와 높은 주택 가격 때문에 인구의 경기도 이 주, 행정중심복합도시로의 행정기능과 공공기관의 이전 문제 등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여러 도시문제를 안고 있다. 이에 따라, 2030 서울플랜에서는 시민참여를 통해 ‘소통과 배려가 있는 행복한 시민도시’란 비전으로 5개의 이슈와 17개의 목표, 58개의 전략으로 통합하고, 공간구조 계획과 생활권계획으로 구체화하여 이를 실현하려고 하고 있다.
도쿄 Tokyo
도쿄는 일본의 수도로서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이다. 행정구역상 도쿄도는 23개 특별구의 구부지역과 그 서쪽 외곽의 타마지역 등을 포함하고 있다. 중심도시인 23개 구부지역은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과 유사한 규모의 시가화된 지역으로, 면적이 622㎢이며, 2010년 약 895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어 2000년의 813만 명에 비해 10%가 늘었다.
그러나 일본은 경제 저성장 추세로 돌아섰고, 금융기관의 이자율이 0%대로 낮아진 지 오래되었다. 2010년 인구의 분포를 보면 유소년 인구가 10.8%로 감소하여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며, 고령화율은 19.8%에 이르러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리고 도쿄대도시권은 도쿄도와 주변의 3개 현인 사이타마, 가나가와, 지바로 구성되어 있으며, 50~70㎞의 광범위한 통근권을 형성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구부의 서측에는 타마신도시가 건설되어 도쿄의 배후지 역할을 하고 있다.
도쿄대도시권은 면적 13,558㎢(국토의 3.6%)에 3,562만 명의 상당한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도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의 본부를 두었던 1603년 이래로 수도 역할을 해왔다. 그 이후 1868년에 메이지 황제가 도쿄로 옮겨오면서 이름도 도쿄로 개칭하였고, 일본의 공식적인 수도이자 중심지로 성장해왔다. 1889년까지 도쿄시는 15개의 구로, 1936년에 현재의 범위로 확대되었다. 그 이후 1943년 의회와 시장이 선출되어 도쿄는 처음으로 자치체가 되었으며, 1947년에 지방자치법에 따라 특별구가 총 23개 구로 늘었다. 1970년대에 들어 도쿄의 23개 특별구는 각각 구청장과 구의회를 투표로 선출하는 등 자치체로서 상당한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1872년 도쿄에서 최초의 철도가 개통되면서 시가지가 공간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교통망이 확충되면서 인구도 교외의 철도를 따라 분산되었다. 철도교통망이 발달하던 당시 도쿄는 통근자들이 야마노테선에서 환승하게 됨에 따라, 신주쿠, 이케부쿠로, 시부야 같은 철도 환승역이 부도심으로 성장하였다. 이와 함께 도쿄의 중심부는 1923년의 관동대지진과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시가지가 크게 훼손되어 정형화된 격자형 도시구조로 개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과 월남전에 힘입은 일본의 급속한 경제성장에 따라 도쿄는 대량의 인구유입으로 교외 팽창을 가속화시켰다. 그러한 가운데 1980년대 후반 들어 도심지역의 지가 상승으로 지가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교외로 많은 사람이 이주하게 되어 교외 통근자가 많이 늘었다.
이 시기의 급속한 도시성장으로 도쿄는 집중과 분산의 두 가지 특성이 있었다. 인구는 도시외곽에서 성장하고, 고용은 도심부와 요코하마, 가와사키, 지바 등에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증가하는 주택수요를 채우기 위해 대형주택 개발사업이 철도 노선을 따라 방사상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자동차의 보급이 급증하면서 주요 간선도로를 따라 산업단지가 다양하게 형성되었다.
1980년대 거품경제의 호황기에 있었던 대규모 도시개발사업으로는 도쿄 도심과 나리타 국제공항 사이의 마쿠하리 신도시 개발사업, 하네다 국제공항의 확장, 도쿄의 임해 부도심을 가로지르는 해상고속도로 등이 있다.
2000년대 들어 대규모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중앙정부의 주도와 지방정부 및 민간의 적극적인 참여로 시나가와, 시오도메, 록본기힐스 등이 개발되고 야간인구의 확보정책이 성과를 내면서 도심 인구가 상당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으며, 인구의 도심회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도쿄의 도시계획 중 2009년에 개정된 도시만들기 비전을 보면, ‘세계의 모범이 되는 매력과 활력을 갖춘 환경선진도시 도쿄를 창조’하기 위해 도쿄는 국제경쟁력을 갖춘 도시활력의 유지 발전, 지속적 발전에 불가결한 지구환경과의 공생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광역 인프라인 공항과 항만의 기능 강화, 환상의 고속도로와 대중교통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 이와 함께, 2020년 도쿄올림픽을 유치해 도시발전을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베이징 Beijing
베이징은 중국의 수도이자 16,411㎢에 이르는 광활한 면적을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 우리나라의 수도권보다 크며, 도시지역만이 아니라 넓은 농촌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서쪽과 북쪽의 산악지형이 전체면적의 60%를 차지하고 나머지 면적은 평지로 베이징의 중심시가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이 베이징시의 행정구역은 대도시권으로 분류하였으며, 그 구성은 중심도시인 성육구의 6개 구와 도시 주변의 8개 구, 두 개의 현으로 되어 있다. 중심도시의 면적은 1,368㎢이며, 2010년의 인구는 1,172만 명으로 2000년의 850만 명에 비해 37.8% 급증하였다. 대도시권 인구도 2000년 1,357만 명에서 2010년에는 1,961만 명으로, 2014년에는 2,150만 명으로 성장하여 이 연구에서 비교하는 7개 도시 중 인구가 가장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도시이다.
베이징은 5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로서 역사적으로 중국 대륙과 요동지방이 만나는 군사적, 정치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국시대 이래 요, 금, 원, 명, 청나라 등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였다. 연나라의 수도이던 베이징이 진시황 이래로 약 천 년 간 수도의 지위를 잃었지만 동북부 변경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수양제나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도 베이징은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그 이후, 거란족이 요나라를 건립하고 나서 남경(또는 연경)이라고 칭하였으며, 12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금나라와 원나라의 수도가 되었다.
원은 베이징의 성곽 둘레를 29㎞로 하여 면적을 52㎢로 확장하였고, 이후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수도로서 비약적으로 성장해 왔다.
천진조약 이후에 영국의 조차지였다가 1937~1945년간 일본에 강점되었던 베이징은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이어 1949년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다시 중국의 수도가 되었다. 1949년 공산정권이 수립된 후 행정기능의 위치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소련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라 행정기능을 구도심의 남측과 자금성의 서쪽에 놓게 되었다. 이후 베이징의 중심도시 인구는 1980년 515만 명에서 1990년 657만 명, 2000년에 850만 명, 2010년에 1,172만 명으로 급속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베이징의 급격한 인구증가는 산업화에 원인이 있으며 이러한 다양한 산업의 성장과 함께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루어냈다.
경제성장을 수치로 보자면 1952~2008년까지 56년간 연평균 GDP 성장률이 10.7%에 달하며, GDP의 총량은 318배 증가하였다. 1인당 GDP는 2008년에 9,075달러에서 2013년에 14,838달러로 성장하여 세계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하였다.
또한, 2000년대 들어 도시의 대규모 개발사업들을 보면, 금융가, IT산업의 중심지 중관촌, 중공업공장을 개조하여 문화산업단지로 변모시킨 798지구, 최근에 2008년 올림픽을 위해 건설한 올림픽촌과 대규모로 개발 중인 CBD 등이 대표적이다.
베이징의 도로망은 2환, 3환, 4환, 5환, 6환의 4각형 순환망과 장안가로 등 도시내부의 동서방향과 남북방향의 격자형 도로망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2000년에는 2개 라인밖에 없던 지하철을 2013년에는 18개 라인을 갖추도록 대규모로 투자하였다. 또한, 최근에는 300㎞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고속철도 노선을 전국 각지로 연결하여 상하이까지 5시 간에, 광저우까지 10시간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과 인구증가는 도시개발의 부작용도 낳고 있다. 대중교통 중심도시로 개편하고자 하였지만 여전히 도시에서의 교통혼잡은 심각하며, 대규모 공해를 유발하는 제조업 등의 산업구조는 겨울철 석탄 중심의 난방구조와 함께 대기오염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징진지계획은 공해를 유발하는 베이징의 전통산업기능을 주변의 허베이성 등으로 옮기고 베이징 내에는 첨단산업과 업무, 상업기능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지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도시기본계획은 과거부터 여러 차례 있었으며, 개방경제 이후에는 1982년, 1992년, 2004년을 예로 들 수 있다.
2004년의 계획을 보면, 2020년의 목표인구를 1,800만 명으로 하고, 성육구 주변에 녹지기능을 강화해 도시성장 경계선을 설정하여 인구를 조절하려고 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이징시의 행정기능을 주변으로 이전하고, 도시경쟁력 차원에서 기존 공항에 더하여 서우두국제공항에 버금가는 제3의 신공항을 2025년을 목표로 건설 중이다. 베이징은 이러한 내용 등을 담은 차기 도시기본계획을 마련 중이다.
싱가포르 Singapore
싱가포르는 말레이반도 남단 싱가포르섬에 위치한 도시국가이다. 싱가포르는 동남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면적이 712㎢이며, 섬의 2/3가 해발 15m 이하의 평탄지이다. 인구는 2000년의 403만 명에서 2010년에는 508만 명으로 성장하였다. 싱가포르 센서스는 시민권자와 영주권자, 그리고 외국인을 포함하여 조사하여 발표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인구는 1920년의 42만 명에서 꾸준히 증가하여 1990년에 300만 명에 이르더니 최근에는 10년마다 100만 명 이상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 중 인종분포를 보면 중국계가 가장 많아 대다수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말레이반도와 남아시아에서 온 이민자 등이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중요한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 지역으로부터 세력 갈등이 있었다. 14~15세기에는 자바 사람 등 여러 민족이 교대로 지배하다가 16세기부터는 세계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16세기에는 포르투갈, 17세기에는 네덜란드의 지배하에 있다가, 1819년에는 영국의 기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싱가포르로 온 식민지 통치관 래플즈(Raffles)는 도시의 기능과 인종 간 커뮤니티를 계획적으로 배치하는 등 오늘날 중요한 도시계획의 토대를 놓았다.
그리고 그 이후인 19세기에 들어서는 영국의 주요한 교역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1차 세계대전에는 영국의 해군기지로서 역할을 했으며, 1942년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 때까지는 일본군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 이후 다시 영국의 식민지와 말레이시아 연방이 되었다가, 1965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싱가포르는 영연방의 하나로 공화국 형태의 정부를 공식적으로 선포한 이후 동남아시아의 상업중심지가 되어 세계무역과 금융센터의 허브로 성장하였다. 싱가포르는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 홍콩, 타이완과 함께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설명되면서 미국 등 서구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싱가포르는 보행자 중심의 도시중심부로부터 외곽으로 향하는 대중교통시스템으로 연결되는 에너지 효율적인 도시구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도심과 주변지역을 지하철인 MRT(Mass Rapid Transit)와 경전철, 버스로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도시중심부에는 혼잡통행료를 징수하는 ERP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대중교통 우선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지하철 또는 경전철망을 추가로 공급하여 늘어나는 교통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아울러, 싱가포르는 세계화된 컨테이너 항구와 세계적으로 수송량이 많은 공항 중 하나인 창이국제공항을 갖추고 있어 국제적인 항구도시로서 손색이 없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주택개발국(Housing Development Board)은 인구증가에 대비한 주택정책의 하나로 고층아파트를 적시에 공급함으로써 주택문제에 대응하고 있다. 산업은 외국의 휴렛패커드, 마이크로소프트 등 첨단산업과 제조업은 물론 국제금융업이 발달해있고, 동남아 국가협의체(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 ASEAN)의 주요한 멤버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합계출산율이 1.15로 서울의 1.02보다 높은 수치를 보이며, 고령화율도 9.0%로 서울과 근사한 수치를 보이고 있다. 결국 싱가포르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서울과 함께 겪고 있으면서도 서울보다 다소 나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싱가포르는 국가개발부, 도시재개발청, 주택개발국이 역할을 분담하여 도시 및 주택 관리가 철저히 되고 있는 도시 중의 하나이다. 도시계획 체계는 1971년부터 10년마다 수립되고 있는 Concept Plan과 이를 구체화한 Master Plan으로 되어 있다. Concept Plan(2001, 2014)을 소개하면, ‘21세기의 월드클래스를 향하여’란 비전을 통하여 지속가능한 경제성장과 삶의 질이 높은 도시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도시에서의 새로운 주거와 고밀도시에서의 살기 좋은 경관, 여가의 다양한 선택, 비즈니스의 유연성, 세계적인 비즈니스센터, 철도네트워크의 연장,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뉴욕 New York
뉴욕시는 미국 동북부의 뉴욕주 동남 쪽 바다에 면하여 위치한 미국 최대 규모의 도시이다. 1524년 지오바니 다 베라자노(Giovanni da Verrazano)가 발견한 후, 1626년 네덜란드인들이 무역사무소를 설치하고 먼저 정착하여 뉴암스테르담으로 불리었다. 그 이후 1664년 영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찰스 2세가 형제 요크 공에게 이 땅을 주며 뉴욕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뉴욕이 최초의 수도가 되었다.
뉴욕시의 2010년 인구는 818만 명으로 2000년의 801만 명에 비해 2.1% 증가하였다. 면적은 784㎢로 서울보다 크며, 인구밀도는 10,430명/㎢로 7개 도시 중 중간 크기이다.
뉴욕시는 맨해튼(Manhattan), 브롱크스(Bronx), 브루클린(Brooklyn), 퀸스(Queens), 스태튼 아일랜드(Staten Island)의 5개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뉴욕대도시권은 뉴욕주의 나소(Nassau), 서퍽(Suffolk), 퍼트넘(Putnam), 웨스트체스터(Westchester)와 함께 뉴저지주의 록랜드(Rockland), 베르겐(Bergen), 파이크(Pike), 서섹스(Sussex), 퍼세이크(Passaic), 모리스(Morris) 등의 카운티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의 헌터든(Hunterdon) 카운티를 포함하여 뉴욕시를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면적의 MSA이다. 뉴욕대도시권의 2010년 인구는 1,890만 명으로 2000년의 1,832만 명에서 3.1% 증가하였다. 뉴욕대도시권의 면적이 17,319㎢이므로 인구밀도는 1,091명/㎢이다.
뉴욕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워싱턴이 남과 북의 경계점에 위치한 워싱턴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잠정적으로 필라델피아로 옮기면서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그러나 북미에서 제1도시를 놓고 필라델피아와 경쟁 중 1825년 이리운하의 개통으로 시카고 등 중서부지역의 곡창지대에 대한 접근성이 좋아져 결국 미국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뉴욕은 항구를 기반으로 하여 유럽의 다양한 기술과 문화의 수입, 내륙으로의 전파, 그리고 미국생산물의 수출기지라는 전략적인 위치에 입지하여 오늘날까지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뉴욕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유럽으로부터의 많은 이민자 유입과 맨해튼 전역의 격자형 도시개발, 중앙의 넓은 센트럴파크 조성 등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도시계획적 토대를 만들었다. 뉴욕은 세계의 금융과 보험, 무역, 기업경영의 국제중심도시이며, 미국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중추도시이다. 특히, 뉴욕에는 일찍이 증권거래소와 미국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이 입지하여 월가를 형성하고 그 일대가 세계적인 금융가로 발전하였다.
아울러, 세계의 많은 법률, 광고, 정보, 하이테크, 디자인, 출판·인쇄 등의 생산자서비스 산업, 크라이슬러와 록펠러센터 등 미국의 자동차 및 전통 제조업의 다국적기업의 본사 등이 입지하였다. 이에 더하여 브로드가에는 연극과 뮤지컬산업이 발달하고, 센트럴파크 인근에는 링컨센터 등이 입지하는 등 예술과 문화, 오락 등 엔터테인먼트산업이 성장하였으며, 그 외 관광산업과 컨벤션산업 기업들이 입지하여 발달하고 있다.
1904년에 런던과 파리에 이어 뉴욕의 지하철이 개통된 후 최근까지 18개 노선이 개설되었으며, 버스 등 대중교통시설이 잘 발달되어 미국 도시 중 대중교통 중심도시로서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특히, 맨해튼 진입을 위한 비싼 교통요금과 맨해튼 내에서의 비싼 주차요금은 이러한 대중교통 위주정책을 펴고 있는 뉴욕시의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뉴욕시의 도시기본계획으로는 기존의 전략계획(Strategic Plan) 외에 뉴욕시의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법정계획’으로서 2007년에 최초로 수립되고 2011년에 두 번째 수립된 PlaNYC가 있다. 이 계획은 2030년을 목표로 ‘더 푸르고 더 위대한 뉴욕시’를 모토로, 뉴욕이 처한 당면 문제인 성장에 대한 대응, 노후화된 기반시설, 열악해지는 환경문제에 대하여 10가지 핵심이슈, 11개 부문별 정책목표, 41개 기본전략과 132개 세부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핵심이슈는 주택·공원, 브라운필드, 교통, 에너지, 기후변화 등이다.
런던 London
런던광역시(Greater London)는 영국의 수도이자 유럽 최대 규모의 도시이며, 런던광역시(Greater London Authority)가 관할하고 있다. 런던광역시는 런던 중앙부의 구시가지인 City of London, 런던 내부의 12개 자치구, 런던 외곽의 20개 자치구를 더해 총 33개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다.
2010년 중심도시인 런던광역시의 인구는 817만 명으로 2000년 717만 명에서 14% 증가한 수치이다. 런던광역시의 면적은 1,572㎢로 7개 도시 중 가장 넓으며, 서울의 2.6배에 달한다. 특히, 행정구역의 상당 부분이 오픈스페이스나 그린벨트로 되어 있으며, 인구밀도는 5,199명/㎢로 7개 도시 중 가장 낮은 편이다.
런던대도시권은 외곽의 그린벨트와 도시들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런던 관할청(Government Office for London, South East, East)의 3개 청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면적이 27,189㎢로 7개 도시 중 대도시권 면적이 가장 넓다. 2010년의 인구는 2,027만 명으로 2000년의 1,839만 명에 비해 10.2% 증가했으며, 인구밀도는 745명/㎢로 가장 낮은 편이다.
런던광역시의 행정을 관할하는 광역지방정부의 존재 여부에 대해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 정부와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 정부 간에 큰 차이가 있다. 먼저, 대처 총리는 집권하자 1986년 대런던 시의회인 GLC(Greater London Council)를 폐지하였으나, 2000년에 런던광역시(Greater London Authority)를 다시 설립하였다. 그리고 대처 총리는 지역의 정치권을 33개 자치구에 위임함으로써, 지방행정과 정책결정을 런던시와 32개 자치구에 의해 이루어지게 했다. 1998년 토니 블레어 총리는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광역서비스의 제공을 위해 다시 광역지방정부의 설립을 제안하고,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런던 광역시장과 시의회의원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런던의 시작은 BC 1세기경 로마인이 런던시 지역에 전진기지를 세운 시기까지 올라가지만, 알프레드왕이 9세기경 런던을 수도로 정한 이후 중요한 중세도시로 발전하였다. 16세기 들어 런던거래소(Royal Exchange)가 설립되어 금융센터로 부상하였다.
런던은 17세기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먼저 1665년 런던시에 대규모의 페스트가 창궐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주었고 그 이듬해에 런던을 거의 전소시킨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런던 대화재는 런던시의 도시계획을 새롭게 발전시킬 기회를 주었는데, 훌륭한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 경에게 도시를 계획하게 한 것이다. 그는 대로를 포장하고 건물의 외장재료가 내화성 재료인 벽돌과 석조로 건축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1710년에는 성바울로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을 설계하여 완공함으로써 런던을 복구시킨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런던은 17세기 동안 인구 50만 명의 세계무역 중심지로 성장하였고, 1800년대 말에 이미 450만 명에 이르러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1863년에 도시철도가 개통되고, 1890년에는 전철화가 되어 교외지역에까지 철도가 보급되었다. 이와 함께, 도시 중심부에 고밀도로 집중되었던 시가지가 자연스럽게 외곽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파괴된 도심지역에서 바비칸센터가 재개발되었고, 1944년 아비크롬비(Abercrombie)가 수립한 대런던계획은 그린벨트를 지정하여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제어하고 도시개발을 시가지 안쪽으로 유도하였다. 그린벨트는 런던의 도심에서 약 16~24㎞의 거리에 16㎞의 폭을 유지함으로써 런던의 도시경계를 한정하였다.
대처 하에서 런던의 계획은 시장경제 논리 아래 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이 주요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업이 도크랜드 재활성화사업과 밀레니엄 돔, 원 캐나다스퀘어 건물 등이다.
2004년, 2008년, 2011년에 수정된 런던계획은 2031년을 목표로 모든 사람과 기업에게 많은 기회를 제공하고, 고품격의 환경기준과 삶의 질 추구, 21세기 도시문제를 해결하는데 리더십을 갖는 제1의 세계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고 6개의 계획목표로 경제와 인구성장문제 해소, 국제 경쟁력 제고, 안전하고 접근성이 양호한 공동체, 건물과 거리의 보전 및 오감만족, 환경개선의 세계적 리더, 일자리에 접근이 쉽고 편리한 도시를 제시하고 있다.
파리 Paris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로서 북부지방의 센강변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파리시는 면적이 105㎢로 서울의 1/5.8에 해당할 정도로 작지만, 그 위상을 고려하여 현(Departement)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시가지는 파리시를 넘어 주변 지역에까지 넓게 개발되어 있다.
파리시를 포함하는 대도시권인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는 8개 현으로 구성된 12,012㎢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2010년 파리시의 인구는 224만 명으로 2000년의 213만 명보다 5.6% 증가하였다. 파리시의 인구밀도는 21,289명/㎢로 7개 도시 중 가장 높아 토지를 집약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파리대도시권은 2010년에 1,179만 명으로 2000년의 1,095만 명보다 7.7% 증가하여 대도시권의 인구증가폭이 더 크게 나타났다.
파리의 역사는 BC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BC 1세기경부터는 로마의 지배하에 센강 주변으로 성장하였다. 파리는 4세기 초반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987년부터 카페왕조(Capetian King)가 왕권을 잡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가 되었다. 13세기 초 가로와 성벽의 건설로 도시는 크게 발전하였으며, 1227년에는 도시 최초로 소르본(Sorbonne)대학이 들어섰다.
16세기 들어 르네상스 양식의 여러 궁전과 상업건물이 건설되었고, 루이 13세와 14세의 통치하에 베르사유궁의 건설과 뛰레리(Tuileries)와 루브르(Louvre)궁 등의 확장이 있었다. 왕실의 호화사치생활 등에 살기 힘들었던 파리 군중들은 1780년 봉기하여 바스티유(Bastille)감옥을 공격하였고, 결국 군주정치를 무너뜨리고 공화정시대에 돌입했으며,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48년 나폴레옹 3세가 등극하여 제2공화정이 시작되었고, 오스만 남작(Haussman)을 파리시 지사로 임명하여 구도시의 대대적인 정비임무를 맡겼다. 오스만은 도심부에 넓은 대로(Boulevard)를 건설해 도시 정비뿐만 아니라 민중반란의 진압도 쉽게 하였다.
19세기 들어 제3공화국 기간에는 중요한 산업중심지로 성장했으며, 수많은 건물과 교량을 건설하였다. 1889년 세계박람회를 개최하여 유명한 에펠탑을 선보였으며, 메트로라고 불린 지하철도 건설하였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치하에서 벗어나자 파리광역시는 다시 급성장했고, 도시 주변에 대규모 신계획 단지들이 개발되었으며, 유네스코(UNESCO) 본부 등이 들어섰다. 도시가 무계획적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1965년 도시정비기본계획을 수립하여 근교에 4개 정비거점과 5개 신도시를 지정하여 개발과 성장을 유도하였다. 187㎞에 이르는 연속된 도시회랑에 신도시와 교외성장거점 축을 대상(띠)의 형태로 개발하고 과감한 공공투자를 통해 인프라와 대중교통을 갖추고 산업과 인구를 유치코자 하였다. 다양한 현대적 상업기능과 업무기능의 개발수요를 구시가지와 분리된 지역에 라데팡스(La Defense)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중심부로 개발한 것은 파리의 17세기 스카이라인 유지와 역사적 도시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파리 광역도시권은 2개의 환상형 고속도로에 의해 형성되는 제1환상권(Premier Couronne)과 제2환상권(Grande Couronne)에 전략적 성장거점지역들을 두어 투자를 집중하고 있으며, 2개의 국제공항과 서유럽을 잇는 4개의 기차역, 영국과 서유럽을 바지선을 활용하여 잇는 센강 등 주요한 교통 중심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 1994년 도버해협의 해저터널로 런던을 TGV로 연결하고 파리의 거점시설과 지역을 고속도로로 연결하고 있다.
2009년에는 그랑 파리 프로젝트(Grand Paris Project)를 통해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를 세계도시로 성장시키기 위해 일 드 프랑스(Ile-de-France) 일대의 도시들을 철도와 고속도로망으로 묶고 다핵의 방사형 도시체계를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파리시의 도시기본계획에 해당하는 PLU(Plan Local d'Urbanisme)가 2006년에 수립되었다. 이 계획의 목표는 파리 시민의 일상 생활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며, 일자리 창출에 힘쓰고, 도시격차를 감소시킴으로써 파리의 연대감을 고취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