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계획 및 관리제도
시대별 도시 계획 및 개발 추이
구한말까지 서울은 사대문 안 도성과 마포 및 영등포를 중심으로 점진적인 공간적 변화를 보이다가 해방 이후, 급격한 인구증가 및 도시발전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도시의 변화와 함께 1966년 장기적인 비전 하에 시행착오를 줄이고, 종합적인 계획 하에 서울을 이끌기 위한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서울의 도시발전 과정은 다른 개발도상국의 모델이 되고 있다.
광복 이후의 서울은 전후 혼란을 극복하고 현대도시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된 토지구획정리와 이들 지역을 연계하기 위한 기반시설을 조성하면서 도시발전을 시작하였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의 준공을 기반으로 1970년대에는 한국의 급성장하는 경제에 맞물려 서울의 주택과 도시기반시설을 확충하였다. 특히 강남개발과 개발제한구역을 통해 성장관리의 시작을 주목해야한다. 1980년대는 도시의 성장기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을지로와 테헤란로 등에 도시설계를 도입하여 용도, 개발밀도, 높이 등의 질 적 관리를 도모하였다. 또한, 주택재개발을 대규모로 실시하는 등 도시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에는 인구 과밀화의 대응으로 수도권 5개 신도시를 건설했다. 도시 내부에서는 지하철을 확충하고 '남산 제모습찾기' 등 도심 발전을 위한 많은 '공공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월드컵과 G20 회의 등 많은 국제행사들을 개최하면서 세계 7위의 메가시티로 부상하며, 지속가능한 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제1기 기반기능 확충기(1960~1979년)
1960년대 : 주택 및 기반시설 정비를 추월한 인구증가
문제해결을 위해 시행된 건설사업
주택 보급을 위한 지속적인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
도시 계획을 위한 첫 제도적인 장치 마련
196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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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6년 「도시기본계획」
- 1966년의 도시기본계획은 서울의 공간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85년을 목표년도로 하였으며 계획인구는 500만 인으로 설정하였다. 공간구조는 도심과 용산을 중심으로 하고 창동, 천호, 강남, 영등포, 은평을 부도심으로 하는 1도심 5부도심 체계로 설정하였다. 도심과 용산은 정치행정의 중심지로 계획하고, 입법부는 남서울(현 영동), 사법부는 영등포에 입지하도록 하였다. 주택지는 도심, 부도심 주변에 고층화를 유도하였으며, 도심을 중심으로 부도심과 연결되는 방사형태의 집중형 가로망 체계를 구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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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 주택 및 도시기반의 조성기
서울의 확장과 한강의 기적
1973년 서울의 행정구역은 현재와 비슷한 605㎢로 확장되었고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현대적인 기반시설의 확충과 계속적인 도시건설이 요구되었다. 이에 응하여 서울은 구식 전차를 걷어내고 지하철 1호선을 1974년에 개통하였다. 또한 고층 업무용 건물, 고급 호텔, 무역센타, 예술문화회관 등의 상업문화시설과 간선도로, 터널, 교량, 하수처리 시설 등 대형 도시기간시설들이 지속적으로 건설되었다. 이를 두고 당시 국제사회는 한국의 단기간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가리켜 “한강의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는 급속한 산업화 및 경제성장이 시작된 시기로 도시화가 점차적으로 진행되어 새로운 도시계획행정에 대한 요구로 인해 다양한 분야의 관련 법제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1년 전면 개정된 ‘도시계획법’에서는 급속한 도시성장으로 인한 무질서한 확산을 제어하고 건전한 시가지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개발제한구역'을 신설하는 등 지역지구제를 보완하였으며, 불량지구개량의 개념을 ‘재개발사업’으로 전환하고 사업시행절차를 규정하였다. 이 밖에도 1976년 ‘도시재개발법’을 새로이 제정하여 도심부의 노후화를 방지하고 시가지의 곳곳에 누적된 무허가 불량주택을 정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국토를 효율적으로 계획‧관리하기 위한 ‘국토이용관리법(1973)’과 주택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주택건설촉진법(1973년)’ 등을 제정하였다.
197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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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 「도시기본계획조정수립」- 1970년대 초 서울의 인구가 500만을 넘어서면서 이전 도시기본계획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970년의 도시기본계획조정수립은 1991년을 목표년도로 하고 계획인구는 760만인으로 설정하였다. 도심 단핵을 중심으로 하는 중심지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부도심을 조정하여 미아, 망우, 천호, 영동, 영등포, 화곡, 은평 외 7개로 설정하였다. 영동에는 행정기능을 부여하고, 여의도에는 입법기능과 신 업무지구를 계획하였다. 가로망은 도심을 중심으로 한 방사순환형으로 3개의 순환선과 8개의 방사선 형태로 구상하였다.
○ 1972년 「시정종합계획」- 도시기본계획으로 명명되지는 못하였으나, 도시개발행정을 추진하기 위한 지침서적인 계획이었다. 1991년을 목표년도로 하고 계획인구는 750만인으로 계획되었다. 도시공간구조는 1970년과 동일하나 가로망계획을 확충하여 6개 방사간선을 추가하여 3개의 순환선과 14개의 방사선 도로로 구성하였다.
○ 1978년 「서울도시기본계획」- 21세기 변화에 대비하는 도시발전계획의 필요성으로 목표년도 2001년, 계획인구 700만인으로 도시기본계획을 재정비하였다. 이 계획을 통해 인구집중과 무질서한 시가지확산을 억제하고 도시기능 및 시설의 재배치, 다핵화를 통한 균형잡힌 도시발전과 직주근접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강북의 혼잡과 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강남개발을 추진하여, 강북과 강남이 한강을 중심으로 균형을 이루도록 계획하였다. 기존의 도심을 1국심으로 하고, 영등포, 영동, 수유, 잠실, 장안평, 수색, 화곡을 7지역중심으로 하였으며, 27지구중심, 157근린중심의 생활권구조를 갖는 도시공간구조를 설정하였다. 또한 한강에 의한 동서 수경축과 남북 산악축을 최대로 이용보존하고 주변의 개발제한구역에 연결하는 대규모의 환경벨트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교통체계는 전철 및 승용차 등의 차량 소통을 위해 간선가로망을 개편하여 방사순환형 가로망 체계를 보완하였고 다핵구조를 유도할 수 있도록 격자형 가로망체계로 개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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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도시성장기(1980~1999년)
1980년대 : 대규모 시가지의 형성과 중심지 개발
서울은 1980년에 인구가 850만 명인 대도시로 성장하였고, 이로부터 불과 8년 후인 1988년에 인구 1,000만 명의 도시가 되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서울은 대기업과 보다 다변화된 산업구조, 그리고 두터운 중산층의 출현을 보여주었다. 1960~1970년대의 경제발전을 주도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서울의 사회경제적 여건변화는 이전 시대에 뒤지지 않는 지속적인 도시건설을 필요로 하였다.
올림픽에 따른 도시 정비
1986년 아시안게임 및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적극적인 도시개선 및 미화를 수행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증대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잠실지역에 대규모 경기장과 올림픽공원 및 선수촌 등 올림픽 관련시설을 건설하는 한편, 한강정비사업에 착수하였다. 이 사업을 통해 도시공원으로 쓰이는 고수부지가 형성되었고, 한강의 양쪽으로는 수질오염을 차단하는 하수관이 매설되었다. 또한, 한강변을 따라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당시의 김포국제공항으로부터 서울 중심부 및 올림픽 경기장이 연결되었다. 서울의 교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하철의 건설도 뒤따랐다. 기존 계획에 따른 건설이었으나 다가오는 올림픽을 대비하는 의미가 컸다. 1984년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었고, 1985년 3호선 및 4호선도 완공되었다.
도심재개발과 주택건설
도심부 내 슬럼지역을 정비하여 증가하는 업무공간을 공급하는 도심재개발도 1980년대의 높은 개발밀도와 세제 혜택을 바탕으로 활기를 띠었다. 이 당시 서울시는 70개가 넘는 도심재개발 사업을 인가하였다. 도심재개발을 통해 서울의 도심부는 전통적인 도시구조에서 현대적인 구조로 변하였다. 이와 더불어 도시의 기능과 미관의 증진을 위해 을지로변과 강남 테헤란로에 도시설계사업이 시행되었다.
한편 정부의 주택공급 목표 달성을 위해 불량주택지의 재개발과 주택건설 또한 중점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에 강남, 목동, 고덕, 개포 및 상계지역에서 대단위 농경지와 산림지가 주거용지로 전용되어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었다. 서울의 고질적인 주택부족 현실에서 아파트 건설이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나타남에 따라 서울은 아파트 건설 붐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서울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켰다.
1980년대는 고도경제성장으로 인한 인구 및 산업의 대도시 집중현상과 과밀 문제가 심각한 도시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택 및 생활편익시설 정비를 통한 주거 안정성 확보와 교육·문화·의료·기타 사회복지 수준의 향상에 따른 도시계획제도의 보완이 요구되어 정부는 1981년 ‘도시계획법’을 대폭 개정하였다. ‘도시기본계획제도’가 도입됨으로써 3단계 도시계획체계(1단계 도시기본계획, 2단계 도시계획 재정비, 3단계 연차별 집행계획)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으며, 보다 상세한 토지이용 제어방식인 ‘도시설계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지역주민에게 공청회나 의견개진 등의 기회를 부여하는 주민참여가 제도화되었다. 이 밖에도 택지의 대량공급을 위한 ‘택지개발촉진법(1981년)’, ‘도시저소득주민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임시조치법(1984년)’ 등 다수의 관련 법제가 마련되었다.
198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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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서울 도시개발 장기구상・중기계획」- 상위계획인 수도권 정비계획법에 따라 기본계획을 수정하여 목표년도 2001년, 계획인구 945만인의 장기구상・중기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기개발계획 기간(1980~1986년)에는 여건변화 및 계획기본 방향에 따라 예상되는 도시구조를 보완하고, 장기구상에 따른 구조계획 기간(1987~2000년)에는 고밀토지이용, 다핵구조화, 생활권계획, 도시환경 정비 등에 역점을 두었다. 이 계획에서는 도시공간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대신 생활권을 18개 대생활권, 90개 중생활권, 333개의 소생활권으로 구분하였다.
○ 1984년 「도시구조개편을 위한 다핵도시개발연구」- 1981년 도시계획법 개정으로 도시기본계획수립이 법정화되고 상위계획인 수도권정비계획이 변경됨에 따라 이에 맞추어 도시개발방향을 조정토록 1984년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이 새롭게 계획되었다. 2000년대를 향한 서울의 계획방향을 제시하고, 도시공간구조의 재편성 및 재정비계획을 위한 지침이 되도록 하였다. 목표년도 2001년 계획인구 1,000만인으로 설정하였으나 공청회의 지연으로 법정화되지 못하였다. 교외화와 광역화에 따른 외연적 확산을 막기 위해 위성도시 및 신도시건설, 분산적 집중개발로 다핵적 도시구조로의 개편을 도모하고, 순환방사가로망의 격자화로 단핵집중형 교통망 개편 등을 계획하였다. 중심지는 도심을 1개의 주핵으로 하고 3부핵(영동, 영등포, 잠실), 13부심, 50지구중심의 체계로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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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 도시기반시설의 확충과 환경에 대한 투자
올림픽 이후 1990년대의 서울은 일 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선 새로운 산업국가의 수도로서 천만의 인구를 가진 거대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보다 다변화되고 차원 높은 새로운 경제와 높아진 시민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도시구조의 개선이 필요했다.
1990년대에는 지하철의 확장을 포함한 수많은 공공프로젝트가 시행되었다. 4개의 지하철 노선(5, 6, 7, 8호선)이 추가로 건설되었고, 새로운 교량과 고속도로, 미술관과 음악당 등이 정부와 서울시의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민간부문이 건설하는 수많은 고층건물들이 서울의 도심지역과 강남지역의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보편화된 승용차 소유와 고속도로망의 건설에 힘입어 시가지가 개발제한구역을 넘어 확산되어 갔다. 이에 분당, 일산 등 5개 신도시와 교외지역이 끊임없이 개발되어 대도시권의 중심도시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IMF외환위기와 금융위기에 봉착하여 서울은 실업, 노동, 노숙자 및 사회복지와 같은 새로운 도시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옛 도심부 관리의 중요성 부각
한편, 조선의 수도로서 정도 600년을 맞아 도심의 과도한 성장과 개발로 잠식되어갔던 서울성곽과 문화재 복원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다. 더불어 남산의 보호를 위해 1990년 “남산 제 모습 찾기” 사업계획이 추진되었다. 이 사업은 전문가, 일반시민, 지역주민 등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남산의 조망을 해치고 있던 외인아파트의 철거와 국가안전기획부 및 수도방위사령부의 이전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한 곳에는 조선시대 남산골 모습을 재현한 남산한옥마을이 조성되었고, 1994년 외인아파트의 철거로 남산의 전경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풍부한 역사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도심부 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새로이 부활된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이제까지 하향적으로 수행되던 도시행정과 도시계획에 주민참여라는 새로운 지방정치과정이 요청되기 시작하였고, 서울의 25개 자치구에 대해서 상당한 자율권을 부여함으로써 자치구를 단위로 하는 다양한 계획과 시설, 활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1990년대에는 도로, 철도, 수도 등 광역적인 정비체계가 필요한 시설을 효율적으로 설치·관리하기 위해 ‘광역계획구역’이 신설되었고, 토지이용의 합리화 및 도시미관개선을 위하여 특정 지역에 건축물의 용도‧층수‧용적률 등을 정하는 ‘상세계획제도’가 도입되었다. 또한 민주화, 지방화 추세에 따라 건설교통부장관이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도시계획 권한이 시·도지사에게 위임되었으며, 건설교통부장관이 도시기본계획을 승인하고자 할 때에는 지방의회의 의견을 듣도록 함으로써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였다.
199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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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 「2000년대를 향한 서울도시기본계획」- 1990년의 도시기본계획은 서울시 최초의 법정계획으로서 의미가 크다. 목표년도는 2001년, 계획인구는 1,200만인으로 설정하였다. 평준화된 기초생활시설의 배치 및 격자형 도로망의 형성, 도시활동중심과 교통연결점을 일치시켜 접근성 향상 등 강남북의 균형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존 도심의 활동이 유지되는 동시에 부도심의 역할이 증대된 유연한 다핵도시구조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도시공간구조는 4대문 안의 1도심과 5개 부도심(신촌, 청량리, 영등포, 영동, 잠실), 59개 지구중심으로 계획하였다.
○ 1991~1995년 자치구 도시기본계획- 서울시는 1991년 7월 자치구 도시기본계획 수립지침을 마련하여 12월부터 각 구청별로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였다. 기존 기본계획의 하향식 계획과정에 상향식 계획과정을 접목시켜 도시계획을 구체화하고 보완하기 위해 마련되었으며, 지역특성과 주민의사의 수렴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계획은 자치구 차원의 장기종합계획으로 자치구의 특성에 따라 장래의 발전방향을 정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과 시책을 구상하였으며 추진사업에 대한 연차별 집행계획을 수립하였다.
○ 1997년 「2011년 서울도시기본계획」- 1990년에 수립된 도시기본계획에 대한 타당성 검토와 수정・보완 작업의 필요에 의해 1997년에 목표년도 2011년, 계획인구 1,200만인으로 설정된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서는 21세기 서울의 미래상을 설정하고, 우선추진과제와 지속추진과제로 구분하여 15년간 계획적으로 추진할 장기목표와 시책방향을 제시하였다. 1990년 도시기본계획과 비교하면 1990년 계획이 서울중심의 계획이었다면 1997년 계획은 기능분담 및 교통망 계획을 광역적으로 접근하였다. 또한, 하드웨어에 치중하는 시설계획 중심에서 소프트웨어 측면의 계획과 함께 운영・관리를 중시하는 계획으로 전환되었다. 도시공간구조도 1990년 계획이 1도심, 5부도심, 59지구중심의 소극적인 다핵화였다면 1997년은 1도심, 4부도심(영동, 영등포, 용산, 청량리・왕십리), 11지역중심, 54지구중심의 계획으로 적극적인 다핵화를 위한 4단계 체계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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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기 지속가능기(2000~현재) : 격조있는 도시 관리와 품격 높은 시민참여
2000년대 : 지속가능한 도시개발
서울 도심부 관리의 성과
선진 도시를 향한 서울의 노력
한편, 2002년 월드컵 대회 개최를 계기로 서울 서쪽에 위치한 상암지구에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을 안정화하면서 탈바꿈하여 친환경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월드컵주경기장과 친환경주거단지(Eco Village)를 건설하고, 최첨단 IT기술을 활용하여 디지털 미디어시티(DMC)를 개발하였다. 이 외에도 한강 르네상스, 동북권 르네상스와 같은 권역별 계획을 수립하였고, 용산국제업무지구, 마곡지구 등의 개발 사업을 시행 중에 있다.
선진도시로서의 품격과 격조 높은 도시미관을 연출하기 위한 도시디자인 부문에도 심혈을 기울여 질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북서울꿈의숲, 서울숲, 푸른수목원 등의 권역별 공원과 서울성곽을 연결한 서울성곽길, 외사산과 주변 산을 연결한 서울둘레길, 한강과 지천을 연결한 보행로 및 자전거도로, 생태문화길 등을 통해 공원‧산‧하천을 연결하는 보행루트를 조성하였다. 거리의 정비를 위해 강동그린웨이, 디자인거리 등 보도정비사업도 시행하였다. 나아가 역사문화, 도보관광 등 관광코스를 발굴하여 걷기 문화를 확산하고자 노력하였고, 차 없는 거리를 지정하여 쾌적한 보행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서울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문화도시의 정체성 확보와 최첨단 국제도시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고, 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다양한 도시정책을 서울의 공간상에서 실현시키고 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시민참여를 통한 공감대 형성이 중요해지면서 2030 서울플랜에서는 ‘시민참여단’ 등이, 후속 계획인 생활권계획에서는 ‘주민참여단’이 구성 및 운영되는 등 계획의 수립에 시민이 적극 참여하였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도시계획 관련제도는 그간의 사회여건을 반영하여 크게 변화하였다. ‘도시계획법(2000년)’ 또한 대폭 개정되었다. 도시의 확산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생활권이 날로 확대됨에 따라 적정한 성장관리를 위해 둘 이상의 행정구역에 대해 ‘광역도시계획’이 도입되었다. 수도권 지역의 난개발 방지를 위해 ‘선 계획-후 개발’ 체계가 확립되었고 장기 미집행 도시계획시설로 묶여 있던 토지에 대한 ‘매수청구제도’가 도입되어 불합리한 규제가 합리적으로 개선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도입된 개발제한구역에 관한 사항을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2000년)’으로 별도로 규정하여 관리하도록 하였다. 1990년대 후반부에 나타난 국가적 외환위기(IMF)에 따른 건설경기 부양, 재산권 침해에 따른 규제의 합리적 개선, 도시과밀 및 환경훼손에 대한 반성 등의 새로운 경향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즉, 개발과 성장 중심의 계획 패러다임이 환경 친화적이며 지속가능한 계획 패러다임으로 변화됨에 따라 관련 법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것이다.
한편, 도시지역에 한해 적용하던 도시계획법과 비도시지역을 포함하여 느슨하게 관리되던 국토이용관리법을 통합 및 개편하여 토지이용의 관리체계를 일원화하였다. 2002년 ‘도시계획법(1962년)’과 ‘국토이용관리법(1973년)’을 ‘국토기본법’과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로 개편한 것이다. 또한, 유사한 목적으로 규정된 도시설계와 상세계획을 지구단위계획으로 통합하였다. 아울러 ‘도시계획법’의 도시개발사업 관련조항과 ‘토지구획정리사업법’ 등을 합하여 ‘도시개발법(2000년)’을 새로 제정하였으며 ‘도시재개발법(1976년)’과 ‘도시저소득주민의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임시조치법(1984년)’ 등을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2003년)’으로 통합하였다. 이와 같이 2000년대에는 상호 연계되거나 중복되는 도시계획제도를 일원화하여 법체계를 단순화함과 동시에 세부 조항을 구체화 시키는 방향으로의 제도정비를 기하였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 등에 의해 쇠퇴하는 도시에 대한 재생 및 재정비에 대한 필요성이 나날이 높아져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2013년)’ 등이 마련되었다.
2000년대 서울의 도시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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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2020 서울도시기본계획」- 1997년의 기본계획을 수정・보완하는 계획으로 목표년도 2020년, 계획인구 980만으로 설정하였으며, 기존 계획의 중심지체계를 존중하여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2011년 도시기본계획이 물적・사회경제적 측면을 포괄하는 종합계획의 성격을 띠고 있다면 2020년 도시기본계획은 전략계획의 성격을 부각하여 목표 및 주요 전략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였다. 또한 전문가 및 시민의견을 수렴하였고, 계획의 목표달성 및 모니터링 지표를 제시, 5개 생활권역별 도시발전방향을 제시하여 권역별 균형발전에 역점을 두었다. 도시공간구조는 1도심, 5부도심(영동, 영등포, 용산, 청량리・왕십리, 상암・수색), 11지역중심, 53지구중심의 체계를 상정하였다.
○ 2014년 「2030 서울플랜」- 2030 서울플랜은 2020년 서울도시기본계획을 수정‧보완하는 계획으로 2030년을 목표년도로 하였으며, 통계청에서 발표한 서울시의 2030년 추계인구는 1,020만 명이다. 2020 도시기본계획은 12개의 부문별 계획이 별도로 수립되어 계획 간 연계 및 정합성 확보에 한계가 있고, 내용이 방대하고 전문적이어서 시민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에 2030 서울플랜에서는 5개 핵심이슈와 17개의 목표로 간소화하여 분량을 대폭 축소하였다. 또한 시민, 전문가, 시의원, 공무원, 서울연구원 등 다양한 구성원의 실질적 참여를 기반으로 계획을 수립하고, 일반 시민들이 알기 쉽게 서술하였다. 그리고 자치구 및 수도권 도시와의 관계를 고려한 광역 거버넌스를 강조하여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계획에서는 주민의 삶의 질 향상 요구, 권역 간 격차 심화, 서울대도시권으로의 광역화, 글로벌 대도시권 간 경쟁심화 등 공간구조와 관련한 과제를 해소하기 위해 다양한 중심지의 연계와 기능적 특성화를 강조한 실질적인 다핵구조로의 전환을 제시하였다. 이에 3도심(한양도성, 영등포‧여의도, 강남), 7광역중심(용산, 청량리‧왕십리, 창동‧상계, 상암‧수색, 마곡, 가산‧대림, 잠실), 12지역중심으로 다핵의 기능적 연계를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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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도시 계획 및 제도의 변천
<그림 2> 서울시 도시 계획 및 제도 변천과 서울의 변화
시사점
서울은 1394년 조선왕조의 수도로 정해진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따른 공간변천을 경험하기도 하였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주택, 상업건물 및 공공기관 등 도시의 많은 부분이 급격히 파괴되기도 하였다. 아무런 바탕도 없던 도시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1980년대까지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다. 폭발적인 인구성장과 행정구역의 확장으로 인한 무허가 정착지 형성 및 과밀 주거, 교통 혼잡, 환경오염 등 각종 도시문제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점점 커졌다. 성북‧강북 등에 신시가지를 조성하면서 많은 도로가 건설되었고, 강북의 기능을 분산하기 위해 강남개발이 추진되었다. 또한, 수도권에 개발제한구역이 지정되어 서울의 무질서한 외연적 확산을 방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서울의 성장 추세는 198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함에 따라 적극적인 도시개선 및 미화가 실시되었다. 잠실지역에 대규모 경기장이 건설되었고 한강정비사업이 시행되었으며, 지하철의 건설과 도심재개발 사업이 시행되는 등 올림픽을 대비하기 위한 수많은 개발이 이루어졌다. 또한, 도시 이미지의 제고를 위한 불량주택지의 재개발과 강남, 목동, 고덕, 개포 및 상계지역에서의 주택건설 등을 통해 폭발적인 주택수요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지하철의 확장을 비롯하여 많은 공공프로젝트가 시행되어 도시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그러나 1997년 금융위기로 봉착하게 된 IMF구제 상황 등으로 인해 서울은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2000년대에 들어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시가지를 과도하게 개발하는 양적인 성장보다 질적인 향상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특히, 2002년 월드컵 유치를 통한 상암지역의 개발과 청계천 복원사업, 도심재창조 프로젝트, 한강 르네상스 등의 사업을 통해 서울의 질적인 개선을 도모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시대별 도시계획 및 관리제도에서 다양한 물리적․사회적․경제적 상황에서 서울의 시행착오와 더불어 유연하고 적절한 대응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맞이할 새로운 사회 및 인구구조의 변화와 시민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여 서울은 새로운 정책 방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방향은 현시대에 서울의 과거와 비슷한 모습인 개발도상국의 도시들이 과거 서울의 경험을 벤치마킹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할 사항이다.
첫째, 과거와 달리 앞으로의 서울은 저출산‧고령화의 추세에 따라 인구가 더 이상 늘지 않고 성장 속도는 안정되어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장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빠른 도시화를 경험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은 양적인 성장과 동시에 질적인 성장을 추구해야한다. 즉, 시가지 개발과 동시에 도시의 질을 향상시켜야한다. 이를 위해 도시는 대규모 개발과 동시에 필요한 지역과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하여 질적 향상을 도모해야한다.
둘째, 도시의 양적인 성장을 추구로 인해 환경과 자원을 무분별하게 이용하지 말고 미래 세대가 이용할 수 있도록 지속 가능한 개발을 도모해야 한다. 서울은 과거 개발을 위해 도시 내 양호한 녹지, 오픈스페이스, 농지, 역사적 자원과 문화적 가치를 훼손시켜왔다. 그러나 현재는 물리적인 유형 자원보다 문화적인 무형 자원의 가치가 더 증가하고 있다. 이를 위해 도시개발에 있어 현 세대만을 위한 자원의 사용보다 미래 세대를 위한 보존을 반드시 고려하여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져야한다.
셋째, 적극적인 시민참여를 통한 계획의 수립과 상․하위 계획 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도모해야 한다. 개발 추진을 위한 과거 하향식 의사결정 방식에서 벗어나 상향식 또는 혼합된 방법으로 전환하여 지역 주민의 요구와 참여를 바탕으로 개발이 시행되어야 한다. 계획 수립에 있어서도 계획 체계의 내실화를 이루어 상․하위계획간의 정합성을 이루어야 한다. 또한 도시 개발의 근본에는 시민이 있다는 점을 염두하여 도시기본계획부터 생활권계획 수립까지 공청회 등을 통해 시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시민참여와 소통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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