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철도]지속가능한 도시 성장의 원동력_서울 도시철도 건설
서울시 도시철도 건설 배경
20세기 초반 서울은 일본 및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노면전차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최초 노면전차는 전기사업의 일환으로 운영되었으며, 도시발전과 동시에 확장을 거듭하였다. 조선 말 서울의 도시 발전축과 일치하는 노면전차 노선망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는 도시계획을 수립하면서 가로를 개설함과 동시에 노면전차를 부설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 서울의 노면전차 노선도와 비교해보면, 현재 도심에서 운영되고 있는 지하철의 노선도와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초기 서울의 지하철은 새로운 노선을 계획하고 건설한 것이 아니라 노면전차의 폐선에 따라 부족해진 대중교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동일한 노선에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 노면전차가 완전 폐선되기 전까지 서울의 대중교통수단은 노면전차와 버스가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면전차의 경우 노선을 확장할 때 궤도를 구축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1950년대 후반 자동차 운행이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된다. 노면전차와 달리 상대적으로 이동이 자유로운 버스의 입지는 점차 강화되었는데, 버스에 의존한 시가지 팽창은 가장 손쉬운 도시교통 해결책이기도 했다.
세계 여러 대도시들이 철도역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었던 것과는 달리, 서울의 경우엔 도로가 개설되면서 공간적 이동이 자유로운 버스를 중심으로 도심에서 가까운 장소부터 시가화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인구 집중에 따른 시가지 팽창은 교통량의 증가뿐 아니라 통행거리의 증가도 수반하게 되었으며, 승용차 이용이 증가함에 따라 다시 도로를 확장하고 버스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악순환 구조의 교통문제가 반복되었다. 따라서 도심에 버스노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으며, 버스용량뿐 아니라 버스정류장의 용량부족 현상이 발생하여 새로운 대규모 수송수단인 지하철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서울의 인구는 조선 말기 20만 명 수준에서, 1936년 시계확장으로 70만을 넘어서고, 일제 강점 해방 후 해외동포 귀국에 따라 100만 명을 초과하게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경제발전전략에 따라 공업화가 추진됨에 따라 서울도심 근접 장소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경인축을 중심으로 공업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공업단지를 형성함에 있어서 정부와 서울시의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는데, 공업화에 필요한 기반시설은 중앙정부가 담당하고 서울시는 집중되는 인구와 활동을 지원할 공간 조성을 담당했다. 그에 따라 1960년 서울의 인구가 250만 명에 육박하고 하루에 발생하는 통행량이 5백만을 넘어서면서, 편리하고 빠른 대용량의 교통수단인 지하철이 서울의 교통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그림1> 노면전차 노선도 (1946) | <그림2> 시내를 운행중인 노면전차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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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도시철도 건설 역사
지하철건설 계획의 수립
1, 2기 지하철 건설: 간선지하철 네트워크의 완성
지하철 2호선은 새로운 도시계획의 틀에 따라 노선의 형태가 결정되었다. 당시 서울인구의 72%에 이르는 약 450만 명이 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강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른 도시기능 집중과 교통 혼잡 발생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울의 공간구조를 3핵 도심으로 재편하는 도시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도시계획에 따라 구도심은 여전히 중심기능을 수행하고, 영등포는 업무지구, 강남은 주거지구로 각각 기능이 구분되었다. 지하철 2호선의 강북구간은 기존 동서방향 노선과 동일한 도심구간을 계승하고, 강남구간에 대해서는 새롭게 조성될 중심지를 통과할 수 있도록 순환망으로 계획되었다.
1985년 지하철 3호선과 4호선의 완공으로 1기 지하철사업이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지하철건설 부채는 2조원을 초과하였고 건설원금은 물론이고 이자를 갚기에도 벅찬 상황을 초래하였다. 또한 계속되는 인구증가와 주택건설로 인하여 지하철 이용객 증가율은 매년 10~16%를 상회하여 1980년대 말에는 용량이 한계에 다다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용량 초과 문제로 인해 지하철의 추가건설에 대한 필요성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으나 막대한 재정적자로 인하여 구체적인 실행대안이 수립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에 1988년 서울시는 재정난을 반영하여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는 가정 하에 기존선 연장과 지선으로 구성된 5개 지하철 노선을 건설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으나 실질적으로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어 사업이 추진되지 못했다.
1989년 국토개발연구원은 기존선 연장을 중심으로 하던 서울시 계획과 달리, 시내를 관통하는 간선철도로 구성된 2기 지하철 계획안을 마련하였다. 계획안은 거점 간 신속한 수송과 역세권 확대를 통한 지하철 서비스 소외지역을 최소화하는데 중점이 맞춰졌다. 또한 2기 지하철은 노선별로 특색 있게 건설되었다. 특히 지하철 5호선은 김포국제공항과 여의도 업무중심 및 도심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서울의 지하철 네트워크 완성을 위한 핵심적인 간선노선이다. 기존의 1기 지하철과 달리 5호선 건설에서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해저터널이 건설되었다. 그에 비해 지하철 6호선은 노선이 집중된 구도심을 피하여 서울의 강북지역에서 지하철 서비스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노선이 계획되었다. 통행 대부분이 노선 내부에서 처리되기 보다는 기존 노선과 환승을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건설되었다.
지하철 7호선은 1980년대에 조성된 상계지구와 강남을 연결하기 위하여 계획되었다. 당초 주거지역으로 계획된 강남은 부도심이라는 기능을 뛰어넘어, 서울의 업무 및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강남을 가로지르는 노선망은 순환선인 2호선 밖에 없었다. 따라서 강남에서의 지하철 네트워크 밀도를 개선하고 주거지역이 밀집된 서울 동북부와 연계성 강화를 위하여 지하철 7호선이 건설되었다. 지하철 8호선은 서울의 동부지역과 위성도시인 성남시를 연결하는 노선이다. 성남시는 1970년대 서울의 철거민이 집단이주한 지역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었다. 특히 성남시 남부에 대규모 주거지역인 분당신도시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건설계획이 추진력을 받게 되었다.
3기 지하철 건설 : 광역급행전철의 건설
2기 지하철의 공사가 본격 궤도에 오른 무렵, 서울시에서는 지하철을 추가로 건설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었다. 2기 지하철 구축 후에도 남아있는 지하철 소외 주거지역을 연결하고, 자동차의 급증에 따라 포화상태에 이른 노면교통 대신 지하철의 수송 분담률을 75%까지 끌어올려서 지하철을 주된 대중교통수단으로 육성하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서울의 교통 문제 해소책으로써 지하고속도로망 건설과 함께 제시된 이 3기 지하철 건설계획을 반대하는 여론은 적지 않았다. 1기 지하철의 채무상환에 고심하고, 2기 지하철의 재원조달도 순탄치 않은 상황에서, ‘달리는 빚더미’ 건설은 공상에 가깝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시장이 지시를 내린 이후 한 달 만에 의견수렴과 타당성조사 등 절차 없이 발표된 이 계획은 졸속이라는 평을 면치 못했다.
또한 3기 지하철 건설계획에 따라 9호선 강남구간의 설계를 한창 벌이던 중인 1997년 말, 외화보유량 부족으로 한국정부가 IMF(국제금융기구)에게 구제금융 조치를 요청하면서, 국가 전체가 경제위기로 빠지는 사태가 빚어졌다. 각종 대형사업의 진행이 불가능해지는 가운데 1998년 5월 기획예산처는 3기 지하철 사업의 재검토를 권고하였다. 이에 대해 동년 6월, 서울시장 당선자는 3기 지하철 사업의 전면 재검토와 더불어 수도권 전철망을 최대한 활용한 광역전철 위주의 도시철도계획으로의 전환도 지시하였다. 지하철 건설 본부 등 관계부처에서는 검토 결과 3기 지하철 중 9호선을 제외한 10, 11, 12호선의 노선을 연기가 아닌 전면 백지화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1998년 9월 계획된 3기 지하철 노선 중 3호선 오금구간연장과, 9호선만 원안대로 착공하며, 11호선은 신분당선으로 단축하고, 나머지는 경전철, 소형 모노레일, 1, 2기 지하철 연결 지선으로 변경하는 계획을 발표한다. 이후 실시설계가 완료되어 있던 9호선에 대한 타당성 조사가 통과되고 수익형 민자사업(BTO)으로 사업계획이 승인되어 2001년 착공이 확정되었다. 이후 3호선 수서~오금 연장구간은 2002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하여 2004년 착공되었다.
서울시는 2001년 10월 시정개발연구원의 용역결과를 반영하여 9호선 1단계(김포공항~반포) 27km 구간의 민자 도입 방안을 결정하였다. 민자 도입 규모는 6,631억 원 정도이며, 민간사업자는 완공 이후 지하철 9호선을 최소한 30년간 운영할 수 있게 하였다. 민간투자시설사업 기본계획이 승인됨에 따라 9호선의 토목구조물과 토지보상 부분을 제외한 차량 도입과 시스템 및 차량기지 설치 등의 나머지 사업에 민자를 유치하기로 했다. 국내 대기업 뿐만 아니라 캐나다의 봄바르디에, 프랑스의 알스톰, 독일의 지멘스, 호주의 매커리, 프랑스국립은행, 일본의 다이와증권 등 외국기업이 지하철 9호선 사업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 이 사업은 여러 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사업을 맡았다.
<그림 3> 1,2기 지하철 구축 현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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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균형 발전 도모, 지속가능한 도시철도 건설의 서울시 10개년 도시철도 기본계획
“서울 교통 비전 2030”에 따르면 「승용차에 의존하지 않아도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는 서울」을 서울 교통 비전으로 설정하였으며, 사람중심, 공유교통 그리고 환경을 배려하는 교통을 중점 목표로 설정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서울 교통 비전 2030”과 부합하는 「철도가 중심이 되는 대중교통체계 구축」을 서울시 도시철도 비전으로 하고, 서울시 도시철도 정책의 기본방향을 설정하였다. 즉, 어느 곳에서나 도보로 10분내 지하철역에 접근하도록 철도 소외지역을 중심으로 도시철도를 구축하여 철도와 보행 중심의 서울시 교통체계를 구성하고, 10분내 접근이 어려운 지역은 버스와 도시철도 간 연결을 강화하는 등 철도망을 중심으로 버스를 연계 조정 하도록 하였다. 서울시는 이를 위해 도시철도 취약지역을 파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 연장이 길고 사업비 부담이 큰 기존 중전철 노선의 건설보다는 km당 승객수요가 10,000인/일 내외의 수요 수준에 적절한 Light Rail Transit (LRT)을 도입하기로 하였다. LRT의 도입으로 도시철도 서비스 취약지역 해소뿐만 아니라 기존 간선철도망에 연계되는 지선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울의 주요 거점을 연결하는 고속의 간선기능 광역철도망을 구축하여 서울내부 거점 간 철도 연결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광역철도 확충 및 급행서비스 제공으로 서울과 광역권 간 출퇴근 통행의 편의도 증진하도록 하였다.
한편, 장래 도시철도 건설 시 서울시 재정사업으로만 진행될 경우에는 적기에 도시철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을 뿐더러 서울시의 재정 부담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민자사업으로 추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민자사업의 관리를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 방안에는 사업추진 전 과정에서 예상되는 문제 발생을 최소화하는 서울시 차원의 철도 민자사업 표준실시협약을 마련하여 일관된 기준을 제시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시된 기준에 따르면 실시협약 단계뿐만 아니라 공사 및 운영 중에도 실질적으로 필요한 조직과 전문 인력 구조를 갖춤으로써, 민간사업자와 원활한 협약 진행 및 발생되는 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서울시는 민자사업을 통해 자금조달을 확보하고, 향후 금융시장의 여건변화가 있을 때에는 사업 수익률 조정 및 재원 등을 반영하여 협약의 내용을 수정할 수 있는 구조를 구축했다.
<그림4> 서울시 10개년 도시철도 기본계획의 장래 철도 노선 계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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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lan for LRT | (b) Plan for High-Speed Railway Network |
정책 도입 노하우
지속적인 지하철 건설과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지하철 운영 조직 구성
서울시는 지하철건설을 추진하기 위하여 1970년 도시계획국 산하에 토목과 건축분야 전문가 6인으로 구성된 ‘지하철건설본부’를 설치하게 된다. 지하철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토목, 궤도, 전기, 통신, 차량, 신호 등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하였으나, 당시 국내 상황은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인력 모집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에 지하철건설본부는 단기간에 필요한 지식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내 연구기관 및 대학교와 교류하여 해외의 기술동향을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분석하였다. 또한 지하철건설본부는 일본에 재정적·기술적 협력을 요청하기 위한 자료를 준비하였으며, 관련 전문가의 해외 견학과 실습 등 다양한 교육훈련도 병행하여 담당하였다. 지하철건설본부의 업무는 지하철 1호선 착공 후 조사·설계뿐 아니라 시공 및 운영준비로도 확대되었으며, 그에 따라 1974년 기술과 운영부문으로 구분된 963명의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지하철건설본부는 지하철 1호선 건설과 운영 경험을 바탕으로 지하철 2호선 건설을 위한 공정계획, 운영계획, 설계 및 시공관리 등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지하철건설본부와 지하철공사로 이원화되어 있던 건설 및 운영조직을 일원화하는 방침이 결정되어 지하철 2호선 개통 후 지하철건설본부는 해산되었다. 지하철 건설의 주체였던 기존조직이 지하철 2호선 완공 후 해산되었기 때문에, 서울시는 2기 지하철 건설을 위해 지하철 건설 유경험자와 지하철공사 파견인력 157명을 바탕으로 지하철건설본부를 재발족하게 된다. 지하철건설본부는 1기 지하철 연장선과 5, 6, 7, 8호선의 건설을 담당하였으며, 약 160km에 이르는 사업현장을 관리하기 위하여 604명까지 조직이 확대되었다. 지하철건설본부는 2008년 건설안전본부와 통합되어 도시기반시설본부로 개편되었으며, 현재 도로, 교량, 터널 등 시설물 관리와 지하철 및 경전철 건설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1990년 2기 지하철건설 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2기 지하철의 운영주체를 결정하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도 높아졌다. 1기 지하철의 운행을 담당하였던 서울지하철공사와의 경쟁을 통한 운영효율화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상당한 부채를 가지고 있는 서울지하철공사와 분리된 기관을 설립하여 2기 지하철의 안정적인 운영여건을 마련해야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시민여론조사, 공청회, 전문기관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994년 서울지하철공사와 완전히 독립적인 제 2의 운영조직인 서울도시철도공사가 설립되었으며, 지금까지 2기 지하철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그림 5> 서울시 지하철 운영 조직의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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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관비율이 높았던 1기 지하철과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부채 비율을 낮춘 2기 지하철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위하여 서울시가 자체적으로 조달 가능한 자금은 약 100억원 내외에 불과했고 그로 인해 나머지 부족한 재원은 차관이나 국고에서 조달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하철 건설에 필수 요소인 차량과 해외 기자재 구매 및 기술용역비 지불 시 대부분 차관을 사용하였다. 8.7km의 지하철 1호선 건설에는 총 330억 원이 소요되었는데 그 중 48%가 부채성 자금으로 그 외에 39.5%는 일본의 차관으로 나머지 1%만이 국고에서 지원되어 서울시의 부채부담이 증가하였다. 지하철 2호선 건설에는 8,771억 원이 소요되었는데, 역시 비용조달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2호선 공사 중에 착공한 3·4호선의 경우 당초 민자사업으로 추진될 만큼 서울시의 재정여건은 더욱 열악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높은 부채성 자금에 의존하였다. 지하철 1호선에서 55% 수준이었던 부채비율은 2호선에서는 63%로, 3·4호선에서는 87%까지 대폭 증가하여, 원금과 부채이자 상환이 어려워졌고 장기적으로는 누적부채로 인하여 서울시와 운영기관에 큰 부담을 초래하였다.
1기 지하철 개통 직후에는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이용객 수로 인하여 영업수지 적자가 발생하는 등 대규모 건설부채로 인하여 신규 사업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었고 부정적인 의견이 속출했다. 그러나 지하철 이용객 수가 매년 9~16%씩 꾸준히 증가하면서 지하철 차량 내 혼잡도가 200%에 육박하는 결과를 낳았고 2기 지하철건설 사업을 요구하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에 서울시 자체적으로 대규모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어렵다는 한계를 인식한 중앙정부는 총리를 중심으로 관련조직을 구성하여 지원 대책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해 1기 지하철 대비 2기 지하철건설 사업에서는 중앙정부의 지원이 22%나 증가하였고 서울시 자체재원의 비율도 11%가 증가하여 부채성 자금의 비율이 감소하였다. 또한 단기간에 여러 노선을 건설했던 1기 지하철과 달리, 2기의 경우 상대적으로 장기간에 걸쳐 사업을 진행하여 안정적인 재원조달이 가능하였다.
도시철도 건설로 인하여 발생한 다양한 민관갈등
당초 동서방향노선으로 계획되었던 지하철 2호선이 타원형 순환선으로 최종 합의되기까지는 빈번한 노선 변경이 있었다. 지하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1970년대 말 새롭게 조성된 고급 주택 지구를 통과하도록 계획된 노선안에 대하여 인근주민의 강력한 반대민원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서울시는 건설공사로 인한 지상부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소발파·미진동공법을 사용하여 터널을 구축하는 신공법을 적용하였다. 또한 시민들에게 지하철건설의 필요성과 어려움을 설명하고 지하철 개통 후 교통난이 해소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심어주기 위하여 홍보활동과 관련조직을 강화하였다.
한편 지하철 3호선 연장선은 인근지역 주민 간에 노선분쟁이 발생하여 두 지역을 모두 통과하는 노선이 구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지하철 노선의 비효율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차량기지는 지하철의 주박이나 정비를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나, 소음 등의 이유로 혐오시설로 인식되어 주변주민이 건설을 반대하고 선로를 막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한 개발규모, 유발수요 및 사업비용에 대한 전문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경전철시스템이 계획되었으나 무조건적으로 간선중량전철의 연장만을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는 경전철시스템에 대한 이해부족과 고규격의 시설을 유치하여 개발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지역민원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여론을 분열시키고 사업이 지연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서울 지하철의 성공요인
1기 지하철의 성공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으나 가장 핵심적인 성공요소는 다음과 같다. 첫째, 대통령, 국회, 시장 등 주요 의사결정자가 서울의 교통난 완화를 위해 다양한 지시를 직접 내릴만큼 교통부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추진함에 있어 당시의 국내 토목기술의 수준을 정확한 판단하여 국내기술만으로 건설이 가능한 범위와 해외기술이 필요한 분야를 명확히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건설 초기 고철파동 및 유류파동 등 국가적인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단기간에 사업을 완공한 것이다. 특히 개발도상국가에서 쉽게 발견될 수 있는 높은 물가 및 노임 상승률을 극복하고 사업을 추진하였다. 넷째, 지하철 건설비용을 절감하고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 위하여 가능한 행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대표적인 간선도로인 을지로의 경우 공사가 진행되던 기간 동안 버스를 제외한 승용차의 통행을 전면 통제하여 원활한 공사 진행 여건을 조성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미래전망을 바탕으로 필요 시 계획을 수정하는 등 과감한 시설투자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현재 서울의 지하철은 규모와 수송실적에 있어서 세계적인 수준인데, 이는 건설단계에서 시설규모를 조정하여 10량 1편성/210m의 플랫폼을 가진 대규모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도시철도 시스템 구축 결과 및 효과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기간에 간선지하철 네트워크의 완성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된 이래로 불과 11년 후인 1985년에 지하철 3·4호선이 완공되어 서울시는 짧은 기간에 대규모 지하철 네트워크를 보유하게 된다. 특히 총연장 137.9km와 120개 역사를 가진 1기 지하철은 1,954량의 전동차를 보유하고 있어 성공적으로 도심의 교통난을 해소하고 다핵화를 통한 서울의 균형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서울시 지하철 네트워크는 2기 지하철 사업을 통하여 양적·질적으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2기 지하철은 1기 지하철에 포함되지 못한 주요거점뿐 아니라 지하철 소외지역에 대한 서비스를 확대하고,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설계되었다. 2기 지하철 완공 덕에 서울은 영업연장 기준 5위, 수송실적 기준 2위의 세계적인 수준의 지하철 네트워크로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2000년대 들어서 개통한 9호선을 포함하여 총 327km의 지하철 네트워크는 도시균형발전과 지속적인 성장의 기틀이 되고 있다.
40년의 역사 속에서 서울 지하철은 전체통행의 36%를 수송
1974년 지하철 1호선 개통 직후의 지하철 수송 분담률은 미미하여, 버스에만 의존하고 있는 대중교통 혼잡해소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용객 수는 1976년 27만 명에서 1980년에 54만 명으로 크게 증가했고, 그 후 지하철 2·3·4호선 개통되고 영업이 안정됨에 따라 1991년 1기 지하철은 전체통행의 21%인 340만 명을 수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하철 수송 분담률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통행 인원수가 증가하여 노면교통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교통체증은 2기 지하철이 단계적으로 개통되던 1990년대 중반부터 점차 완화되었고, 지하철 분담률은 더욱 증가해 30%를 상회하게 되었다. 반면 지하철 분담률의 증가에 따라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버스의 역할이 감소하였는데, 1976년 80%에서 1999년 29%로 격감하였다.
구분 | 1974 | 1980 | 1986 | 1990 | 1996 | 2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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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 81 | 66 | 57 | 43 | 30 | 26 |
지하철 | 1 | 7 | 15 | 19 | 30 | 35 |
택시 | 17 | 19 | 16 | 13 | 10 | 7 |
승용차/기타 | 1 | 8 | 12 | 25 | 30 | 32 |
<표1> Change in Subway Mode share (5)_ 자료 :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00), 서울통계
시사점
경제발전에 따라 인구유입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버스중심의 도시교통시스템은 도로혼잡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인구 300만명에 이를 즈음에 지하철 건설을 단계적으로 준비하였으며, 600만명이 넘어섰을 때 첫 지하철이 완공되었다. 서울시는 과감한 의사결정과 강력한 추진의지를 가지고 300km 이상의 네트워크를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단기간에 건설하여, 지하철 중심의 대중교통체계로 도시교통문제에 대응하였다. 서울시의 지하철에 대한 투자는 도로혼잡을 개선하였을 뿐 아니라 사고감소, 유류비 절감, 이용자편의 극대화 등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와 경제성장 지원이라는 큰 역할을 했다.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지하철사업은 국가차원에서 추진되기도 하지만 도시 내 교통을 처리하기 위하여 지자체 주도로 추진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늘어나는 재정수요에 비해 부족한 세입으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지하철건설은 부채성 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개통 후에도 상당한 재정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지원, 해외자금 활용, 민간자본 유인 등 효율적인 재원조달 방안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며, 운영단계에서 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요증진방안과 적절한 요금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최근 지하철은 단순 이동공간에서 탈피하여 경제·문화 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는데 역사의 입체적 개발이나 역사주변의 토지이용을 고려한 적극적인 부대사업은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지하철사업은 이용객의 과다추정, 건설과정에서의 사업비 변동 및 공기연장, 운영단계의 적자누적 등과 같은 위험이 항시 존재한다. 또한 도시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한 타 분야의 대형투자사업과의 우선순위 결정에 신중해야 한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효율적으로 자원을 배분하기 위해서는 사업계획 수립, 타당성 분석, 설계단계, 시공단계 등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일련의 체계와 수행할 수 있는 기관·조직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 에너지, 자원문제로 인하여 도시 내 교통수단으로서 지하철의 위상과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다만 개별 도시들이 처한 상황과 상이한 도시특성으로 인하여 언제, 어느 정도 규모의 지하철이 필요한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없다. 그러나 지하철이 긍정적인 사회·경제적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하고 있어, 인구집중이 가속화되고 있는 개발도상국가의 대도시들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지하철을 중심으로 하는 교통체계를 구상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0, “서울교통사”
서울특별시, 2003, “서울 지하철 건설 삼십년사”
서울특별시, 2013, “서울특별시 10개년 도시철도 기본계획에 대한 종합발전방안”
서울특별시, 2013, “서울 교통 비전 2030”